《언피지컬 리듬》
어떤 것. 생성 작용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어떤 것에 맥이 깃들 때 비로소 존재로 명명된다. 생명 없는 존재는 어떤-것에 불과하다. 생성과 소멸, 집합과 해체. 일련의 힘의 밀고 당김-비가시적 작용의 매커니즘은 모두 생명 작용의 연속이다. 존재는 무한히 축적된 시간을 지나며 가닥으로 분해된다. 타존재와 결별한 생명은 끊임없이 살아남아 모든 파편 속에 잔존한다. 잔존-보이지 않는 어떤 장에서 그저 ‘있어 온’. 수많은 존재의 파편들은 비정형의 모습으로 방향 없이 유목하지만 그들은 사건의 흐름대로 각자의 미시적 사유를 짊어진 채 어떤 경계 안으로 재결집한다.부서진 존재들의 그룹은 평면을 낙하한다. 수평과 수직, 중심과 주변부-어떠한 방향도 이 모순적인 시간의 요동 속에서 파편은 존재-내-존재로 나아간다. 생명의 불연속적 표면은 무용하다. 존재는 생명의 경계를 공유하며 그 안에 살아남아 있다. 어떤 것들의 집합은 이 경계 안에서 유동적으로 헤엄치며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교차 속에 섞인다. 선이 쌓인 곳에 면이 만들어지듯 분화의 궤적은 흘러온 시간을 무한히 쌓아올려 중첩된 시간성을 구축한다. 구성의 리듬을 이뤄 존재를 형상화한다. 존재는 하나의 종결된 형상이 아닌 그 자체로 작용의 주체로서 스스로 연결과 해체를 반복한다. 신(新)존재로서의 생성, 파편들은 저마다 새로운 신체를 만들어낸다.전시는 잔존하는 생명의 흔적을 조명한다. 끊임없이 있어 온 모든 생명은 행동, 사유, 의식과 무의식적 차원에 스며들어 있다. 이들은 존재의 기억과 습관, 관습과 상징으로 비인간적 힘의 모습을 나타낸다. 존재-내를 약동하는 일련의 작용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어 온 것이기에 어떤 의식의 노력이 없어도 자연히 본연의 자리에 서 있다. 생명의 파동은 모든 작용으로 비선형적 축을 형성한다. 형체를 잃은 경계. 생명은 그 비물리적 힘으로서 무수한 그 어떤-것에 존재의 지위를 선물한다. 우리를 스치는 파편 속에서 생명은, 여전히 생존했음을 증명하며 안녕을 확인받는다.
KO WOORI
고우리
고우리는 일상생활에서의 다양한 관계들로부터 촉발되는 불편한 감정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회화의 물성 실험과 액션페인팅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붓이 아닌 작가 자신의 신체를 활용하는 것은, 감정의 표현에 있어 작가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다. 작가는 손이나 머리카락으로 형상을 그려내거나 색을 칠한 표면을 손톱으로 긁어 스크래치를 낸다. 때로는 물감을 칠한 캔버스 위에 올라가 뒹굴며 궤적을 남기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러한 화면들을 바느질로 엮는 작업을 더하고 있는데, 앞과 뒤를 모호하게 하여 의도적으로 ‘이면’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소강 상태로 직접 이끌지만, 흔적들에 아로새겨진 감정은 형상을 얻어 지속되며 관람자들에게 새로운 층위의 기억으로 제시된다.
PARK YEAJI
박예지
박예지는 용접기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의 작품은 방울방울의 철이 한 데 모여 잠시 굳어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이렇게 가느다랗게 접해있는 점들, 혹은 선은 꼭 우리의 삶과 같이 역동적이다. 그런데 ‘접(接)’과 헤어짐은 인생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에 적용되는 규칙이기도 하다. 금속 방울들이 뭉쳐 만들어진 이 찰나의 순간,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작가의 이전 작업들은 말의 형상을 다룬 것이 많다. 작가는 말 형상에 대해 말(馬)에 대한 애정을 담은 것일 수도, 말(言)에 대한 두려움은 담은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작가의 말은 수많은 표상과 뜻이 섞인 이 세계와 닮아있다. 모호한 형태가 얽히고설켜있다. 하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도 박예지 작가의 작업은 얇게, 그렇지만 단단히 잇닿아있다. 마치 손을 내밀어주는 것처럼, 박예지 작가의 작품은 보는 사람마저 이어줄 듯 하다.
JUNG SANGWOO
정상우
정상우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각자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오랜 시간 기억될 만한 이야기가 아닌, 그저 사라질 것을 기다리는 이야기 조차 작가는 붙잡아 그만의 표현 방식으로 남기고자 한다. 파편적인 흔적의 형태를 한 이야기들은 그 자체가 비서사적이고 비맥락적이다. 이야기를 수집하며 작업을 진행하는 작가는 비맥락적인 것들의 집합체를 만드는데, 이는 잔존의 한 형태이다. 작가의 표현으로 ‘두서없이 뻗어 나가는' 낙서 드로잉과 이를 ‘더듬더듬 엮은' 영상 작업은 곧 생명의 약동과 잔존, 그 이중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목적없이 헤매고 있는 형태 없는 이야기들을 동정하는 작가는 그 모든 것을 긍정하며 세상의 한 편에 자리잡도록 돕는다.
JI IHO
지이호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지이호는 인간 신체의 유한성에 주목한다. 첨단 과학의 발전 속에서도 인간 모두는 자신의 신체 내부를 직접 확인할 수 없고, 디지털화된 이미지로만 접할 수 있다. 작품은 그 자체로 물리적 몸을 가진 존재로, 우리로 하여금 비가시적인 인간의 몸을 환기하며 자신의 몸에 내재된 타자성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평등한 육체적 경험에서부터 공감대라는 비물리적인 생명성을 자아내며 유기체 일반을 아우르게 된다. 작가의 물성 실험은 바느질, 페인팅, 콜라주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확장되어 가며 제한되지 않은 형식으로 구현된다. 작가가 지향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스펙타클한 시각성을 필두로 하여 인간 신체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를 불러 일으킨다.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현대미술학회
전시기획팀 C.A.S
C.A.S.는 다양한 예술 현상에 대한 스터디를 바탕으로 매년 전시를 기획,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학회원들은 전시 준비를 위한 모든 업무를 분담하여 수행하고, 작가별 큐레이팅팀을 구성해 활동합니다.2023년 C.A.S.는 총 9명의 학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유정 이재희 강혜인 김은서 박민지 박윤아 박정연 이나경 이태영
기획의 글
생명은 정의되지 않는 힘이다. 이 비물리적인 움직임은 잠들어 있는 사물을 틔우고, 전면에 세우고, 존재로서 기능하도록 하며 이 모든 과정에 역학적 작용으로 개입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구성되는 모든 순간에 있어 생명은 점과 선, 표면, 구조에 이르는 모든 개체에 운동성을 부여한다. 존재의 근원을 발동시키는 힘과 근원 분자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리듬은 유기적인 이미지를 채우며 또 다른 생명을 발동하게 한다.이미지는 복합적인 운동의 현장에서 산발적이고 파편화되어 있으며, 제멋대로 결집했다가 해체하고, 등장과 퇴장을 마음대로 결정한다. 이 생명-이미지는 수없는 탈바꿈을 거쳐 외형을 탈피하고 마침내 관념만으로 존재하게 될 때도 그 자체로 유의미한 생성의 출현으로서 자리한다. 한편 잔존(Weiterleben)은 생성적 생명과는 다른 방향으로 동작한다. 이들은 과거에서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유형, 때로는 무형의 형태로 자리한 채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재출현한다. 그저 드러남의 영역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은닉하며 동시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어딘가에 숨었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 이들은 그 어떤 새로운 생성보다도 현대적이며, 동시대적이고, 심지어는 이-시간, 동시간대에 놓여 긴박한 미래의 시간까지 탐닉한다.위베르만은 잔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어떻게 잔존에 죽음을 선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출몰하는 기억 일반에 죽음을 선포하는 것만큼 헛된 것이 아닌가?"
1생명에 대한 논의를 위하여 그것이 자리해 온 일련의 시간, 즉 역사성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역사 개념은 특정한 시간 경험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다. 이 경험은 역사-시간 속에 함축됨과 동시에 역사를 주조한다. 다시 말해 시간과 경험은 서로의 경계를 자유로이 오가며 자신이 대면하는 개념을 유동적으로 변모시킨다. 어떤 장면에 대한 목격의 경험, 정신적 충격, 트라우마, 공감 등 경험으로서의 시간은 역사를 기억으로 전환한다. 시간으로서의 경험은 역사를 주관화하며 역사 이후의 시간을 전면에 내세운다.이미지의 역사성에서 중심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매개자로서의 기억'이다. 기억은 우리가 과거라고 칭하는 '지나간 시간'을 이미지화하고, 그러한 이미지를 응시함에 있어 일정한 기준점을 부여한다. 이를 통하여 보는 이의 시선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역사와 결부하여 대상화되는 동시에 주관화된다. 벤야민은 변증법적 이미지 이론을 통해 이런 이미지는 어떤 역사적 순간의 긴장을 갑자기 정지시킴과 동시에 전이함을 이야기한다. 이 변증법적 이미지는 대상을 표현하지 않고, 대상을 갑자기 현재로 끌어들인다. 그것은 대상에 응축되어 있던 힘이 어느 순간에 방출되어 지금-시간, 즉 살아 있는 현재로 변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이미지가 전달하는 것은 단지 표현이 아니라, 모든 대상으로부터 분출될 수 있는 현재의 짧은 빛남이다.사물은 그들 각자에 내재하는 에너지와 힘들을 교환함으로써 상호 간에 직접적으로 소통한다. 사물의 언어는 약동하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일종의 악장이다. 그리고 이 말 없는 언어는 다양한 번역을 통해서 인간의 언어가 되는데, 이 언어의 본질은 이름을 부르는 것(Bennenung)이다. 사물은 언어적 형식을 빌려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타나 것이다. 때문에 사물들은 현재 속에서 스스로를 현실화한다. 이들은 이미지에 포착되었다고 해서 단지 정지 상태에 놓여있지 않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현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배열을 구성하는 역동성을 띤다. 이 활발한 사물의 장, 즉 복작한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이미지는 기존의 관계들을 언제든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다. 사물은 현재를 현실화한다.
2현재하는 사물은 지나간 시간으로부터 계속해 존재해왔다. 이 존재함의 근원에는 어떤 살아있는 힘(forces vives), 즉 생명이 존재한다. 생명 작용은 특정한 사건이나 시스템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약동하는 작용 그 자체이다. 역사적 생명은 콘텍스트(context)를 이루는 사건에 대한 공간적 작용임에 더불어 변화와 항상이라는 대비되는 힘 사이의 변증법이기도 하다. 생명은 어떠한 방향성이나 특정한 연속성 없이 그 자체로 자유롭고 또 비자유적인 운동의 지위를 갖는다. 이들의 생동적인 변신은 그 자체로 비물리적 역학 관계를 구성한다.생성은 지나치게 잠재적이고, 또 비가시적이기에 이를 직접적으로 목격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생성 과정의 잠재성은 궁극적으로 표면을 향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에 있어서 생성되는 힘과 그러한 역량은 그 자체로 역사적 생명의 요소를 이루며 수천 가지의 맥락에 편입된다. 그러한 맥락의 구성 순서에 따라 우리는 선적인 시간 위에 놓인 역사로 인식하지만 생명에 있어서 역사는 끝없이 순환한다. 생명은 분명 변화하지만 장래, 또는 과거에 대하여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든 표면으로 드러나며 끝없는 잠재성으로 분화한다.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지배하고자 투쟁하는 수많은 힘이 공존하는 장이다. 상대적인 소멸과 끝없는 변신 과정에 사물은- 사물에 내재한 생명은 생성의 차원 속에서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 비물리적인 힘이라는 역설적인 움직임으로 존재한다.
3현대미술학회 C.A.S. 의 새 기획전 「언피지컬 리듬」은 동시대 작가 4인의 작업을 통해 잔존하는 생명의 흔적을 제시한다. 작품으로 제시되는 이미지- 일련의 사건과 사물은 잔존한 것과 생성되는 것들이 상호 배타적으로 기능하는 생명의 장으로 나타난다. 고우리는 물리적 작용의 결과로 발생한 어떤 흔적에 주목한다. 캔버스에 새겨진 이 충격의 파편 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비가시적인 감정적 층위를 생성하고, 또 다른 감정과 형상을 재생산한다. 박예지는 금속을 쌓아 올림으로써 시간의 축적을 가시화한다. 서로 다른 온도와 형태로 녹고 굳어진 이 금속의 층위는 연결적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대를 지내온 거대한 물성적 맥을 구성한다. 정상우는 오독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이야기의 생성 가능성에 주목한다. 맥락을 찾지 못한 채 부유하는 서사적 조각은 그것이 해석될 수 있는 표면을 향한다. 지이호는 파편화된 신체를 통해 생명의 맥락을 재구성한다. 소망(消亡) 가능성이 배제된 신체는 두터운 시간의 경계를 함유하며 끝없는 잔존의 증거를 제시한다.생성의 매커니즘은 형태로써 그 모습을 가시화하고, 사물과 이미지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존재는 잔존의 시간과 같은 타임라인을 공유하며 또 다른 역사를 스스로의 신체에 기록하고, 이를 어떠한 형태로 세상에 내보인다. 우리는 우리에게 낙하하는 이미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이미지의 목격자가 되어 생동의 현장을 목도하고자 한다.
글 신유정
참고 문헌서동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서울: 현실문화 A, 2018.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잔존하는 이미지: 바르부르크의 미술사와 유령의 시간』, 김병선 역, 서울: 새물결, 2022.
조르조 아감벤, 『유아기와 역사』, 조효원 역, 서울: 새물결, 2010.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김규철 역, 서울: 워크룸프레스, 2019.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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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피지컬 리듬⟫은 시각 예술 전시의 경계를 넓혀 작품뿐 아니라 문헌과 정보의 아카이빙, 그 속의 '언어'를 주목한다.관념적 생명의 흔적은 문자 영역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책'이라는 질료 속에 응축된 생명은 문장과 문단, 하나의 완결된 글 속에 활자군으로 자리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치밀하게 조직된다. 작가와 작품의 메시지와 결을 같이 하는 네 권의 책들은 도서라는 물질적 지위를 넘어서 전시가 조명하는 여러 형태으로서의 생명의 흔적을 관람자에게 제시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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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룸 프레스
ㅤㅤ워크룸은 서울에 위치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이자 출판사이다.
ㅤㅤ2006년 이래 주로 미술관, 박물관, 기획자, 미술가, 저술가와 협업하며 시각문화 전반과 연관된 작업을 해 왔으며 미술, 디자인, 문학, 인문 분야의 책을 출판한다. 임프린트 작업실유령을 슬기와 민과 공동 운영하고 있다.
동수상회
ㅤㅤ동수상회는 ⟪언피지컬 리듬⟫의 파빌리온 공간인 space mm의 갤러리 옆 책방이다.
ㅤㅤ두 달마다 한 출판사를 초대하는 ‘월간책방’을 운영하고 있으며, 2023년 12월부터 2024년 2월까지 워크룸프레스와의 협업을 진행한다.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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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인 판매 기간 : 2024. 1. 10. - 1. 13✷ 할인 내용 및 구매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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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노라 캐링턴 『귀나팔』
로베르트 무질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
한유주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사무엘 베케트 『죽은-머리들 / 소멸자 / 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작들』
북 큐레이션

리어노라 캐링턴 『귀나팔』 X 지이호
신체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노화와 죽음의 무게감. 『귀나팔』 의 주인공 메리언 레더비 역시 92년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보철 장치인 귀나팔은 노화된 신체의 불완전함을 표상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권력을 부여하고 그녀의 삶에 재미를 더해 놓는다. 메리언은 귀나팔을 이용해 자신을 양로원으로 보내려는 아들 내외의 이야기를 엿듣거나, 담벼락을 타고 올라가 비밀을 염탐하기도 한다. 이러한 귀나팔의 재귀성은 우리가 세상에 부여한 경계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전복적이다. 양로원 노인들이 덧그려 낸 연대와 우정의 회선들은 우리 모두가 사이보그적인 -소진될 육체를 가진, 보완이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며 시작된다. 괴짜같은 할머니에서 혼종적인 사이보그로, 그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출발한다.
지이호의 작업은 이를 역방향으로 전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형상을 남긴다. 지이호에게 보철 도구는 신체의 모양과 상태를 반영하며, 작품마다 필요한 맞춤형 장치를 제작하여 다시 작품의 몸의 상태를 드러내고자 한다. 몸을 반영하는 보철과 같은 보조장치를 덧대어 매끄러워진 현대인의 신체에서도 불완전함을 완전히 은폐하지는 못하는데, 불완전하기에 우리 모두는 사이보그가 되며 사이보그이기에 우리의 신체는 불완전하다.
현대의 다성적 층위에서 존재를 한 데 모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몸이라면?
우리는 제 몸조차도 꿰뚫고 통제할 수 없지만,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공감과 결집을 거듭하는 하나의 맥락 안으로 모여 새로운 파란을 만들어내는 매개체로 작동한다. 불완전하기에 열려 있는,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다시 출발한다.

로베르트 무질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 X 정상우
삶을, 나아가 죽음을 제멋대로 기억하는 행위는 생을 이어주는 하나의 방책이다. 오독에서 태어난 이야기 줄기를 원줄기에 엮어 넣음으로써 생의 갈래를 더 길고, 두텁게 하는 것이다. 이는 삶의 여정에 대해 작가 정상우가 제안하는 일종의 새로운 헌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로서 타인에 의한 유고의 출판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로베르트 무질은 언뜻 작가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걷는 것으로 보인다. 무질은 작가가 두었던 가치의 무게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투박한 시간순으로 출판될 유고를 완곡히 거부하며, 자신의 힘이 남았을 때 직접 유고를 출판하기로 결정한다. 죽음까지의 여백을 뛰어 넘어 명료한 마침표를 찍은 뒤, 활자들이 무사히 마침표를 향하도록 앞으로 돌아와 다시금 써 내려가는 것이다. 죽음 이후를 마저 이어갈 유고의 생을 우선 설계한 셈이다. 불완전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이들 모두는 추억 속에 재단될 ‘나’의 형상에 두려움을 느낀다. 타인의 기억을 빌어 연속될 무형의 삶은 죽음 이후를 바라보도록 하지만, 그 끝맺음은 주체적 통제를 벗어나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삶이 끝난 이후, 오독이 만들어낸 나이자 나 아닌 나로서 다채롭게 연속할 것인가, 생물학적 ‘나’의 통제 아래 만들어진 ‘나’를 강제로 주입시킬 것인가? 새롭게 주어질 무형의 삶에 대한 연속성 앞, 정상우 작가의 작품과 로베르트 무질의 글이 관념 확장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한유주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X 박예지
겨울의 거리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꽃집, 영수증 조각, 빨대, 나뭇잎으로 이뤄진 도로처럼 영문 모를 인연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인연들은 눈치 채지 못할 때가 많고, 스쳐지나가는 일이 다반사다.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는 사람들, 화단의 고양이. 모두 우리의 시간에 족적을 남기지만, 흘러가버리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는 그 존재들을 하나하나 새겨넣는다. 그리고 글을 매개로 독자를 그들과 또 한 번 맞닿게 한다. 길게 늘어진 이어짐을 한 데 뭉치는 매듭인 셈이다.
우리들의 세상은 불규칙하고, 비정형적이며 불연속하다. 그 끊임없는 무질서 속에서 세상의 구성물들은 만났다 헤어지고 묶였다 풀린다. 이곳저곳으로 뻗어가는 우리의 이어짐은 그래서 위태롭다. 확신할 수 있는 것도, 단언할 수 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세계의 조각들은 각지고 차갑지만은 않다. 눈이 내리는 날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자와 장갑을 갖고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말이다. 차가운 것과 따뜻한 것이 이어지는 곳, 미끄러짐과 잡아당김이 공존하는 시간. 이 책이 담은 우리의 세게는 그렇게 또 이상한 리듬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리듬은 박예지의 작품과도 공진한다. 박예지의 작품은 수많은 관계의 이어짐과 어긋남을 축적한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너와 나, 우리의 관계를 수많은 방울로 모아 형상화한다. 작품 속 파편들은 수직, 수평을 이루지 않아도, 선형적이지 않아도 수용된다. 관람자와 작품 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뾰족한 마음도, 즐거운 기억도 작품은 모두 받아들이고, ㅣ를 우리와 이어지는 다리로 사용한다. 박예지의 작품은 모든 것을 뭉근한 열기로 남게 한다. 가벼운 순간의 만남일지언정 그 이어짐만은 분명히 존재했다고 입증하듯, 순간 순간을 꼭 붙들어 맨다. 붙들어 매고, 남겨둔다.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와 박예지의 작품은 그렇기에 유대의 증거이며 앞으로 쌓여갈 관계의 기반을 마련해준다.

사무엘 베케트 『죽은-머리들 / 소멸자 / 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작들』 X 고우리
책 『죽은 머리들 / 소멸자 / 다시 끝내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실패작들』은 사뮈엘 베케트의 단편집으로, 1960-70년대에 저술한 실험적인 글이 담긴 책 세 권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주로 인간의 고뇌, 한계, 죽음 등 심오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베케트의 문학에서 시간의 흐름은 비선형적이고 어려운 구조를 가지며, 특유의 소멸될 듯한 축소적인 표현으로 초현실적인 상황과 인물이 묘사된다. 베케트 자신이 직접 ‘소멸자(dépeupleur)’로서 인식과 혼란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구현하는 불완전한 세계는, 다만 개인 존재를 무(無)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극대화한다. 변주와 함께 반복되는 문장들은 결국 각자의 소멸자를, 또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표상된다. 이러한 서술은, 작가가 문학 속 인물들을 빌려 한 주체의 우발적 흔적과 잔존하는 상을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이는 작가 고우리가 물성 실험과 수공예적, 신체적 행위를 반복하며 자신의 감정을 소강시킴으로서, 침강된 개인을 마주하는 시간을 담아내는 방식과 닮아 있다. 또한 두 작가는 텍스트로, 또 이미지로 본질에 대한 혼돈을 제시하면서, 익명의 존재가 날것의 내면에 파고들어 무언가 자각할 수 있게 만든다. 어쩌면 혼란으로 다가올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개별자의 삶을 다각적으로 고찰해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즐길 수 있게 한다.
전시 정보

디자이너 진서영
아트스페이스 이색
서울 종로구 율곡로 49-4 1층, 2층 (안국동 159, 03060)
2024년 1월 10일 - 1월 23일 (11시 - 19시)
T. 02 722 8009 (+82 2 722 8009)
✷ 오시는 길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좌측으로 50m 직진, 좌측 안국동 우체국 사이로 보이는 안국159 건물 1~2층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버스 : 109, 151, 162, 172, 6011, 7025 (안국역, 종로경찰서, 인사동)
- 주차장은 유료입니다(하나은행 건물 뒤 유료주차장 이용).
space mm
서울 중구 을지로 12 서울시청지하상가 시티스타몰 새특4-1호
2024년 1월 2일 - 1월 27일 (12시 - 18시)
T. 010-7107-2244
✷ 오시는 길
- 지하철 1호선 시청역 하차 후 을지로입구역 사이 서울시청 지하상가로 걸어오시면 됩니다.
-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하차 후 지하상가로 시청역방향으로 걸어오시면 왼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지상에서는 프레지던트 호텔 옆 지하 시티스타몰로 내려와서 왼쪽 시청역 방향으로 50미터 직진 시 왼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큐레이팅 글 - 강혜인
영점에서 시작한 호흡은 다른 세계를 부른다. 이를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새롭고 위험하다. 그러나 끊임없이 운동하는 생명들의 접점을 말하는 데에 이상을 논할 수 있을까. 자극을 회피하고 차단하는 것은 답일 수 없으며, 우리는 언제나 관계에서 불시에 찾아오는 유쾌하지 않은 감정과 그 모순 같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실체 없이도 강력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다스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삶을 지속하는 방식이다.이에 고우리는, 회화 재료들의 물성을 파헤치고 실험해 보기를 택한다. <Exterior 2> 연작 중 18번에서는 프라이머를 바른 천을, 16번에서는 앞뒷면이 다른 천을 구겨서 물에 담금질한 뒤 표면을 탈락시키는 일련의 행위가 반복된다. 이로써 만들어진 불규칙한 표시는, 결과가 아닌 행위 자체가 패턴이 되어 긴 시간 속 반복으로 이뤄낸 심연으로의 도착을 선언한다. 여기에는 드로잉이 후행 되기도 하는데, 가장 깊은 곳에 닿기 위한 어떤 여유가 요구되고 또 느껴지는 앞선 작업과는 달리 보다 즉각적이고 발산적으로 나타난다. 이 감정이 만든 순간의 길은 다시금 닦아내어도 화면에 재료가 고이기도 하는데, 이렇게 남은 것들은 영원한 해결과 그로 인한 소멸이란 존재하지 않는 감정을 은유한다. 화면을, 또 내면을 쓸어내듯 가시화한 비가시성은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휘발되며, 아주 서서히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작가는 더욱 유연한 존재가 되기 위한 시도로 <Flexible Mark>연작을 이어간다.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무채색과 대비되는 색채의 사용은, 다른 도구가 아닌 작가 자신의 신체 움직임과 결합하여 서정성을 더욱 고조시킨다. 서로 다른 감정을 자아내는 색이 올라간 표면을 손으로 쓸고, 손날로 닦고, 손톱으로 긁는 등 점점 기민해지는 과정과 때로 직접 천 위에 직접 올라 뒹굴기도 하며 남기는 궤적은 내밀한 감정의 주체로서, 이를 어떤 매개도 빌리지 않고 직접 다스리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특히 <Flexible Mark 01 (weigh)>의 좌측 하단에 남은 서명 같은 발자국은 행위자로서 작가의 존재를 각인한다. 요동치듯 고요하게 숨이 남아있는 화면은 행위가 더해지고 오히려 물감이 덜어지며 가능해진다. 고우리가 직접 자신의 감정을 소강상태로 이끌면서, 물감은 각기 다른 정도로 걷어져 레이어를 만든다. 이는 작가가 열어낸 기억과 감정의 창이 되며, 감상자는 그곳에 접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생은 감정을 가지고, 감정은 생을 가진다. 고우리의 작품에서는 이 둘이 서로를 지목하고 붙들며, 소강되지만 소멸되지 않은 채 긴장과 조화의 리듬이 만들어진다. 감정과 그 흐름은 무언가를 지시하려 하지 않으며, 응축된 그 자체가 작가 자신에게 의미가 되어 화면에 자리한다. 이러한 흔적은 단순히 어떤 일에 대한 증언 혹은 재구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아로새겨진 감정이 형상을 얻어 지속되어 감상자들에게 새로운 층위의 기억으로 제시된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우연의 집합 속에서 작가와 감상자가 함께 마주하는 것은 끝이 없는 끝, 다름 아닌 미결이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성이라기보다는, 의미가 의미로 계속하여 이어지고 호흡하는 창조적 장에 가깝다. 모든 새로운 파편은 허용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정교한 감각의 진동 속에서 작가의 시간은 비로소 존재하고 있다. 고우리는 자신이 만들어 둔 자리에서 어느 시간에 충분히 발산된 에너지가 사그라든 뒤, 여러 표시와 얼룩들이 자유롭게 잔존하게 두면서 새로운 의미의 생성을 기다린다.
큐레이팅 글 - 박민지
우리가 지닌 불안과 모호함은 본디 인간이 지닌 복잡한 감각 작용의 흔적이다. 특히나 개별자들이 맺는 관계는 한없이 불안정하기에 여러 번 어긋나고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필연적인 만남들은 아무리 모호한 것일지언정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 불분명한 존재들은 인간의 물질적 생존에 결코 필수적이지 않은 요소이나, 생명이 생명으로서 남아있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정의내릴 수 없는 관계와 감정의 편린이라도 붙잡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불분명한 형체의 무언가를 결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인간 생명의 흔적은 그 신체를 벗어나 불분명한 형상으로 자리하기도 한다. 고우리는 이 비물질적인 형상들 중에서도, 인간 사이에 피어나는 감정과 관계를 포착하여 회화의 물성을 통해 담아내고자 했다. <Exterior 2 16>, <Exterior 2 18>은 손끝과 손톱을 이용하여 작품 표면의 형태를 구성한 작업이다. 두 작품에서 손끝에 맴도는 인간 고유의 박동과 움직임은 선율과 파동이 되어 회화 표면에 머무른다. 또한 손날로 기존의 형태를 닦아내고 다시 그림을 채워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무(無)와 유(有)를 계속해서 넘나든다. 이러한 고우리의 작업 방식은 존재와 비존재, 본질과 비본질의 경계를 흐트러뜨림으로써 무엇이 본질인지 결코 알 수 없는 흔적을 그려내고 있다.작가의 작업 기조는 <Flexible Mark (Crack) 02>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 고우리는 물을 먹인 캔버스를 구겨 캔버스 겉과 안 사이의 ‘틈(Crack)’을 발견하려 시도한다. 겉도 안도 아닌 불분명한 경계 사이의 틈,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이 작은 공간이야말로 생명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경계의 틈을 찾아내는 작업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소강시키고, 감정은 점차 흐려질지언정 그 과정에서 표상된 흔적들은 고우리의 회화 평면에 고스란히 남는다.신체 일부를 사용하는 고우리의 작업 방식은 <Flexible Mark (weight 01)>에서도 이어진다. 고우리는 캔버스 천에 유화 물감을 바른 뒤, 그 위에서 직접 뒹굴어 자신의 움직임을 그림에 담아낸다. 신체 일부뿐만이 아닌, 온몸까지도 사용하여 만들어진 추상이 캔버스 위에 남아 물감을 바르는 것 이상의 격렬한 흔적이 드러난다. 발자국을 비롯한 작가의 신체적 흔적은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작가가 온몸을 사용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표상한다. 작가 본인이 느낀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동안 수많은 신체적 행위가 작품의 표면 위에 계속해서 쌓여간다. 그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은 작가 자신이 쌓아온 과거의 시간을 마주한 결과물이다. 생명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축적된 시간은 그렇게 비로소 가시화되어 회화의 표면을 붙잡은 채 머무르게 된다.고우리의 작업에는 과거의 흘러가는 감정들을 붙잡아 오랜 신체적 행위의 반복을 통해 켜켜이 쌓은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게 쌓인 지난한 시간의 층위는 붓이 아닌 신체가 직접 가닿은 형태로, 신체의 움직임과 감정의 리듬감으로 드러난다. 그런 방식으로 고우리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결국 작가 본인의 개별적 경험 그 이상으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인간 감정의, 나아가서는 생명이라는 어떤 존재의 증명이다. 모호함과 불안정성 속에서 그 감각을 인정하고 들여다볼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란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는 점에서, 인간의 껍데기에 갇힌 편린을 포착하는 고우리의 회화는 이러한 마주함을 이어주는 회화이다.
큐레이팅 글 - 박정연
우리 모두의 역사는 맺어지고 끊어지길 반복한다. 애틋했다 소홀했다 하는 인간관계처럼, 만나고 헤어지길 계속하는 매일처럼 모든 것은 예측할 수 없이 비정형적으로 쌓이고 또 무너진다. 하지만 끊어졌다고 해서, 어긋났다고 해서 예전의 일들이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꾸준히 모습을 바꾸어 가며 우리의 일부로 꿋꿋이 남는다. 그 축적과 이어짐은 사회부터 개인까지 크고 작은 것들을 구성하는 중요한 리듬으로 작용한다. 수많은 변주와 편곡을 거쳐서 말이다.꾸준히 살아남는 파편들은 각자의 역사를 지닌 채 유동적으로 붙었다 떨어진다. 그 움직임에는 어떤 계급도, 권리도 의무도 없으며 그저 세계라는 테두리 속에서 자유로이 유영할 뿐이다. 하지만, 박예지의 작품은 뭉쳤다 끊어졌다 하는 순간들을 끈질기게 붙잡아 둠으로써 흘러가는 순간들을 포착한다. 습관과 기억을 통해 아직까지 살아남은 파편들처럼, 타지 않고 액체처럼 변하는 금속조각들을 하나하나 쌓아서 보관해둔다. 어떤 모습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게 될지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파편들이 수많은 떨어짐 속에서도 꾸준히 이어져 온 것처럼 박예지의 작품은 관람자의 찰나 역시도 맞닿게 하고 그 만남을 통해 순간의, 그렇지만 오래 기억될 화음을 이끌어낸다.박예지는 용접 기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그의 작품들은 금속 파편 방울들이 한 데 모여 잠시 굳어있는 모습이다. 금속을 쌓거나 접붙여 만들었음에도 이들은 둔하거나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 연약하고 예민하며 유연하다. 이렇게 가느다랗게 접해 있는 점들은 갓 생겨난 것 같기도 하고, 사라지기 직전인 것 같기도 하다. 생성과 소멸 두 양극단의 사이에서 앙상하게 뻗은 박예지의 작품은 그 결과 울퉁불퉁한 긴장감을 준다. 이러한 ‘접(接)’과 헤어짐의 아슬아슬한 약동은 이 세상 만물에서 발견되는 것이기에 우리와 공명하고, 친근한 느낌을 준다.박예지의 작품 중에는 생명이 자라난 듯한 모습을 가진 게 많다. 작가는 이 같은 유기적 형상에 대해 한 생명체에 대한 애정을 담은 것일 수도, 일상의 감정을 담은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작가의 말은 수많은 표상과 뜻이 서로 얽히고 설킨 채 쌓여 있는 우리의 세계와 닮아 있다. 박예지의 작품이 가지는 해석의 여지들은 관람자들과 만나 각각의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다. 혹자는 자신의 경험을 빗대어 공감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자는 자신의 의미를 새로이 부여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작품에 새로운 방울을 더하고 다른 금속 판을 깊숙이 새겨 넣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 같은 관람자와 작품 간의 관계들이 작품에 새 생명을 부여해 또다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들이 모여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그래서 유대의 축적물이라 할 수 있다.그런데 그렇게 이어진 선들은 가지런하고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전복이 일어나기도 하고, 흘러내리거나 찢어지기도 한다. 위와 아래가 불분명해보이기도 하고, 중간중간이 갈라지거나 비뚤어져 있다. 박예지의 작품이 언뜻 웃자라거나 어색해 보일 수 있는 것처럼, 작품이 가지는 의미도 가끔은 틀어지고 어긋난다. 작품의 부분에 따라, 작품을 보는 횟수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쉬이 달라진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며 상기한 경험과 관람자가 부여한 뜻은 그 자체로도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박예지의 작품은 수많은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속에는 한 때 연결되어 있던 관계들의 흔적이 기억되어 있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했던 존재들의 에너지와 시간 역시도 함께 남아있다. 잔존하는 세계의 잔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큐레이팅 글 - 이태영
박예지는 역사의 이면에서 발생하는 개별 존재들의 미시적 상호작용에 주목하여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언어라는 작은 단위를 가지고 작업한다. 만남과 헤어짐, 인연과 스쳐감을 위태로이 넘나들며 맺어진 저마다의 관계들은 본래 맥락에서 벗어나 세계의 기저에서 살아숨쉬며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잡는다. 관계,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말은 인간의 삶이라는 공통된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온 잔해이자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는 파편조각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에 따르면 과거는 불완전한 모습으로 현재에 소환되면서도 동시에 근원적 온전함을 회복하고자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들은 문명(文明)의 명문화(明文化) 과정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기록에서 생략된 과거의 잔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른 시대의 잔해나 이질적 침전물과 뒤섞이며 지층을 형성한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계를 지탱하면서 우리의 무의식 속에 녹아들어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을 과거와 연결시킨다. 동시에, 그 잔해들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벤야민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깨진 사기 그릇의 파편 조각처럼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는 근친성을 지닌다.박예지는 우리의 경험을 과거 존재와 연루시키고자 근원적 과거를 의도하는 파편적 잔해들을 발굴하고 축적하여 제시한다. 현재에 소환된 과거를 통해 우리는 근원적 과거를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개인 간의 경계에서 발생하는 유동적인 관계와 삶을 용접에 비유한다. 말 한 마디에 따라 우리 사이가 냉과 온을 오가듯이, 용접 또한 녹고 굳는 과정을 반복하기에, 그는 용접봉을 녹이고 쌓아올리는 행동 하나하나에 우리 존재에서부터 파생되는 모든 관계들을 담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fleur> 시리즈에는 말의 일부가 녹아들어 있다. 하나의 긴 용접봉이라는 공통분모에서 떨어져 나온 서로 다른 모양의 방울들은 미완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라스코의 동굴벽화 위로 다양한 염원을 담은 흔적들이 겹치듯, 그의 말은 인간 문명의 상징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관계의 집적이다. 열을 받아 용접봉 끝에 둥글게 맺힌 방울은 이내 떨어져 흘러내리고, 매끈한 모양 없이 뒤엉킨 파편들의 중첩은 불규칙한 리듬을 형성하며 상이한 시간과 맥락을 그러모은다. 잔해로서의 과거만 생각했을 때 불가능했던 존재들의 결집은 파편 조각으로서의 과거를 사유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해진다. 작품에 중첩된 인간 관계, 더 들어가 그것을 만드는 사람 사이의 언어는 인간 삶의 역사라는 근원적 과거로부터 떨어져 나온 잔해이자 다시 결합 가능한 파편 조각이다. 박예지의 ‘관계 쌓기’는 말(言)로 비유되는 관계의 비선형적 결집을 통해 근원적 과거, 즉 말(馬)로 비유되는 거대한 인간의 발자취를 가냘프게 소환하는 작업이다. 이에 대해 개별 주체들의 미시적 역사를 쌓아올림과 동시에 과거 잔해를 발굴해 내려가는 행위라고 하겠다.<Vigne>는 과거를 축적하여 현재로 소환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재의 관객을 과거 존재와 연루시킨다. 작품 속 성글게 얽힌 관계들은 너와 내가 이어지듯, 관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박예지는 부유하는 잔해들을 건져내어 인간의 거대한 서사시를 가느다랗게 엮어낸다. 그리고 현재의 관객에게 과거와 이어지고 관계맺을 수 있는 장을 만들어낸다. 쌓아올려진 관계들은 공간을 감싸듯이 배열되고, 이들의 흐름은 중앙의 원형에서 만난다. 작품 중앙의 보이드는 관객이 섬세하게 연결된 개개의 내러티브를 찬찬히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서 작가가 건져올린 개별 역사의 파편들은 새로운 맥락으로 편입되어 재창조된다. 이를 통해 잔해로서의 과거가 현재의 동기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다. 박예지의 말에서 느껴지는 이유 모를 따스함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세계의 기저에서, 우리의 무의식에서 살아남아온 과거 존재들의 생명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를 매개로 과거의 존재들과 현재의 관객 사이에서 맺어진 관계는 미시적 역사로 편입되어 새로운 리듬으로 흘러간다.
큐레이팅 글 - 박윤아
생명은 때로 생존의 증거가 된다. 생존했다는 것. 그것은 어딘가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나의 족적이 여전히 간직되고 있음의 확증이다. 일종의 생체 저장 장치로서 ‘나’ 자신과 분리되는 ‘존재’는 불안을 내면화한다. 나눠 담기지 않은 유일무이의 저장소로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 속에 매 순간 스스로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의 안에 축적된 정보에는 인과성과 당위성이 결여되어 있다. 비이성과 이성의 경계가 모호한 선택의 순간들이 뒤엉켜 있으며, 심지어는 주체성을 온전히 떠난 듯 보이는 순간마저 존재하는 것이다. 타자의 시선에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태로운 형상으로 비치는 탑은 ‘나’에게 만큼은 지극히 견고한 환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순간 ‘나’와 ‘존재’를 면밀히 살핌으로써 둘 사이의 괴리를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된 몇 축복받은 ‘나’들은 불안함을 느낀다. 일명 ‘존재의 불안’에 닿게 되는 것이다.정상우는 이 같은 불안에 주목한다. 그는 불안이 존재와 불가분적 요소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때문에 그의 작업은 불안의 승화가 아닌, 불안의 풍랑에 작가 자신을 내맡기기 위함이다. 비논리적인 축적과, 환각 같은 견고함이 자아내는 위태로움의 구현을 위해 작가는 서사의 당위성과 인과성을 삭제한다. ‘작업'의 목적성 아래 형성될 수 있는 인위적인 방향성을 삭제하고, 오직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감 - 혹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다. 이는 ‘정처 없음의 수집'으로 정의될 수 있다.갈피를 잡지 못한 수집의 과정에는 작가 특유의 강렬한 흑백 낙서가 함께한다. 작가는 전통적으로 완결성의 대척점에 있어 왔던 낙서의 관용적 맥락을 십분 활용한다. 때문에 그의 작업은 마치 이야기꾼이 소재를 풀어놓듯 완벽히 짜이지도, 완전한 날것도 아닌 중간자적 상태로 남으며 불분명한 모든 것들 사이의 헤맴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정도(正道)없는 나아감과, 그사이 의도되지 않은 정처 없는 수집은 자유 비행을 동경하도록 만든다. 아슬한 걸음 사이, 당당한 날갯짓으로 쏜살같이 앞서가는 새는 어느새 나의 목표로 둔갑해 있다. 어떠한 인과성도 존재하지 않는 비논리적인 변화임에도, 이미 존재론적 불안감에 매몰된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때문에 정상우의 <새잡기>에는 오직 순도 높은 갈망만이 담겨 있다. 붙잡고자 하는 손에는 틀림없이 간절함이 스며 있으나, 그 대상은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것으로 관절의 움직임에는 어쩔 수 없는 서투름이 묻어난다.새들이 만들어 내는 자유 궤적을 좇으며 나아가는 ‘나’는 역설적으로 ‘정도(正道)’ 위에 올려진다. 새들의 몸짓은 어느새 스스로 만들어 낸 이상의 틀이 되어, 나로 하여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유를 좇았으되 결국 자유와는 정반대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자유 추구의 역설’을 놓치지 않는다. 때문에 그가 담아낸 화면 속 인물은 동경의 존재를 곧 잡을 듯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찬 모습이다. 일그러진 표정과 어둠 속에 곧 잠길 듯 어른거리는 손끝은 곧 잡힐 비정형의 어떤 것을 손아귀에 두었음이 아닌, 어쩔 줄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한 방황의 몸짓으로 읽히는 듯하다. 정상우는 또한 이 같은 역설이 만들어 내는 딜레마적 고통을 새와 사냥꾼의 관계에 비유한다. 새가 되고자 달렸으나 그 끝에 마주한 것은 마침내 자유를 체화한 누군가 대신 무자비한 사냥꾼이었다는 것이다.
큐레이팅 글 - 이나경
발전하는 과학 기술 속, 특히나 매체의 발달은 인간이 오랜 시간 가지고 있던 아카이브적 충동을 부추겼다. 계속해서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인간은 수집한 자료를 공개하고자 하고, 동시에 아카이브에 담긴 정보를 보호하고 숨기고자 하는, 자크 데리다가 말하는 반복 – 강박의 과정을 거친다. 데리다가 제기하는 아카이브에 대한 질문과 가설은 모두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에서 비롯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카이브의 객관적 근원, 즉 살아있는 기억에 다가가려는 시도는 결국 검열이나 탄압에 의해 좌절된 망각된 기억의 사후작용이다. 하여 아카이브 너머의 망각과 기억의 재생 과정은 트라우마의 재현방식과 동일하게 반복 – 강박의 조정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카이브를 행하는 것(archiving)은 우리가 행동함에 따라 새로운 기록이 또 남겨지고, 이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반추되기 때문이다. 자료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닿고자 하는 진실과 가장 가깝고 유의미한 것들을 추구한다. 그 자체로 완결된 것, 혹은 완결을 가능케 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하여금 우리는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를 살며, 미래를 계획한다.아카이빙을 하기 전, 자료를 수집할 때 인간은 서사성이 존재하고, 동시에 완결된 이야기를 선호한다. 안정된 이 자료들은 이야기가 끝맺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든 꺼내어 질 수 있고, 또 다른 이야기들과 관계 맺기가 용이하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잔존하는 형태로 남겨진다. 그에 비해 불안정한 자료들, 예컨대 미완결로 남아 있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선별의 과정에서 배제된 채 언젠가 사라질 것을 기다린다. 끊임없이 생산되어 떠다니는 이야기 가운데 정상우는 어설프게 숨어있는 사람, 하염없이 달아나는 뒷모습, 만사에 무관심 한 듯 날아가는 새 등에 관심을 보인다. 그가 집중하는 이 대상들의 공통점은 불분명한 목적 속 계획되지 않는 서사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고정된 서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스스로를 내몰아간다.<대령과 두 번의 죽음>에서 나타나는 오독의 과정은 고정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의식적인 행위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 1927~)의 소설 『백년의 고독』 중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죽음의 장면에서 묘사된 가이나소 떼의 움직임은 철저히 소외된 죽음, 그리고 거룩한 죽음으로 해석된다.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양자 중에 작가가 오인한 후자의 해석은 대령의 죽음에서 거슬러 올라가 그의 생애 또한 수행자, 초월자와 같은 모습을 띄도록 한다. 이때 우리는 작가가 오독으로 하여금 또 다른 서사 생성의 가능성을 예기(豫期)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작가의 오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가 사용한 매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마치 ‘낙서’한 듯 그려 나간 작가의 드로잉은 완벽하게 재단되지도, 완전한 날것도 아닌 합판 위 목탄으로 얼룩처럼 남겨지고 이 옆에는 파편 조각과도 같은 2D 애니메이션이 덧대어 진다. 낙서의 형태로 드러나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하찮기에, 우리는 이를 완벽한 서사성이 부여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 병치되면서 단 하나의 서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부정하는 과정이 여러 번 중첩됨으로써 이미지와 이야기를 꼬이게 만든다. 즉, 가느다란 오독이 꼬이고 얽혀 동아줄 같은 형태를 보이며, 곧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내포한다.정상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오독의 과정, 드로잉 또는 2D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되는 낙서 매체는 맥락이 불분명한 채 헤매는 이야기들, 곧 소멸될 이야기들이 우리 곁에서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밝힌다. 그 자체로는 무용할 지 몰라도 작가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우리에게 현시 되는 이야기들은 주변의 것들을 붙잡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큐레이팅 글 - 김은서
우리는 천 가지의 몸을 가졌다. 우리 생명체는 개인과 개인이 각자의 신체 영역을 그린 형태로 나뉘어져 있다. 몸이 갈라져 있으니 하나가 되지 못하고 그렇게 멀어진 사이에는 공유되지 못하는 것들이 방랑한다. 몸이니 마음이니 하는 것들은 이해되지 못하고 억척같이 벌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세상의 많은 장애와 질병 가운데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은 극히 얕다. 누군가는 신체적 회복을 위해 무거운 마음으로 구매했을 의료 용품이 그 질병을 경험하지 못한 개체에게는 심미적으로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재활을 위한 훈련 도구인 ‘핀치 운동 훈련기’는 지이호의 상상에 의해 면과 부분으로 해체되고 평면으로 재조합되어 <Sammons Preston 핀치 운동 훈련기 A1966T - Pinch Exerciser>로 재탄생한다. 우리는 서로의 몸에 대해 한없이 무지하기에 그 몸으로 살아가는 서로의 삶에 대해서도 파편적으로만 짐작할 수 있다.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 가지의 삶이 존재하는데 나머지 구백 아흔 아홉 가지 삶에 대해서는 미지한 채로 살아간다.내가 가진 한 가지의 삶마저도 부지의 상태로 헤매고 있다. 개별 생명체는 자기 몸뚱이와도 분리되어 미완의 경험만을 연속시키며 살아간다. 의료 엘리트라고 명명되는 외과 의사에게도 예외는 없다. 환자의 신체 내부를 관찰하며 조작할 수 있는 의사조차도 자신의 피부 아래만큼은 두 눈으로 관찰하지 못한다. 지이호의 <외과 의사>는 스스로의 몸을 온전하게 조명할 수 없는 이러한 불안정성과 그로 인한 무력감을 이야기한다. 명확한 형체를 알 수 없이 늘어뜨린 천은 두 발로 지탱하고 있는 듯 신체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신체의 형식에 단단히 귀속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형태로 되어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형태는 등 뒤의 매듭을 통해 연결되는데 이 매듭을 통해 수술포는 두 가지 몸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가진다. 굳건히 서 있는 신체와 자신의 신체에 대해 한없이 무력하여 무너져버린 두 몸의 대비를 표식화하는데, 두 몸체의 힘이 대비될수록 그러한 속성은 더 강화된다. 내 몸과 나를 완전한 하나라 여기며 살아왔거니 결국 나는 반만 남겨지게 된 것이다.피부 뚜껑 아래는 상상 속에만 머물러 있다. 죽어도 죽어서도 내 명맥의 뿌리는 나는 모르는 것이다. 지이호는 <양상자> 시리즈를 통해 동화 ‘어린 왕자’를 차용하여 양상자 천 구멍 너머로 신체를 들여다보는 외과 의사의 관찰 경험을 빗대어 표현한다. 상자 속의 양을 상상하여 독자에게 전달해주는 어린 왕자의 역할은 환자의 몸 안을 대리 관찰하여 전달해주는 외과 의사의 역할로 치환된다. 그러나 어린 왕자와 외과 의사의 매개가 부재한 개인의 몸은 아이러니하게도 몸의 주체에게 가장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존재하며 짐작의 영역으로만 남게 된다. 반면 알 수 없기 때문에 작동하는 상상, 불안, 걱정은 신체적 안녕을 포함한 몸의 다양한 가능성,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더듬도록 이끌어낸다.한편 인간 개체는 파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의 육신을 통해서 나의 그것도 회득할 수 있으며, 신체를 가졌다는 공통분모에서 서로의 몸뚱이를 바라보며 공감을 움틔울 수 있게 된다. 아울러 돌봄이라는 행위로 확장되어 서로를 마주보고 주무르고 돌아본다. 지이호는 작품 또한 다치고 회복하는 몸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고, 작품의 삶을 위해 실천하는 여러 가지 돌봄을 가시화한다. 작품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부동불변의 고요함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인지를 상기시킴과 동시에 나 또한 얼마나 많은 돌봄을 매개로 구축되어 왔는지를 더듬어보게 된다. 또한 돌봄은 우리가 따로 떨어진 몸을 가졌기에 가능한 작용으로, 차이를 바탕으로 서로를 보태어 채워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가 되지 못한 몸들은 서로가 떨어져 있기에 유효할 수 있었던 것들을 공유해온 관계가 되어 파편성과 생명성의 양립으로 이어진다. 스스로는 해체될지라도 비물리적인 경로로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내어, 여신한 생명성을 드러낸다. 내 안에서만 돌던 것들이 생명의 너울을 타고 타인의 굴레로 스며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한데 모여 하나의 물결을 이루는 것이다.
큐레이팅 글 - 이재희
미지(未知)는 호기심을, 때로는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치밀하게도 무모하게도 이루어졌다. 모든 지적 생명체의 본능인 호기심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동하며 인간을 지금의 인간으로서 살게 했다. 광활한 태양계와 드넓은 바다에 대한 동경으로 등장한 우주선, 잠수함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은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 일상의 가장 긴밀한 곳에서 ‘알 수 없음‘의 상태로 남아있는, 그것은 바로 나의 몸이다.생명체는 몸을 단위로 삶을 지속하기에 저마다의 다른 몸을 갖는다. 유토피아적 풍경에서 모든 존재는 하나의 유기체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여전히 한계 지어진 물리적 기반에 머물러 있다. 나는 나의 신체에 고여있는 존재이므로 나와 당신의 방정식을 참으로 만드는 미지수의 값은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각자의 우주이기에, 모두의 우주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는 서로의 몸을 마주할 수는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접속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몸으로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그렇기에 서로의 고통을 더듬어 보게 된다. 나와 당신이 연속체라면 불가능했을 단편적 존재만의 힘이다.그렇기에 지이호는 몸을 택하고 고민한다. 그가 구현하는 작품은 그 자체로 서서 관람자와 대면하며 상호작용하는 몸을 갖는다. 시간 속에서 다치기도 하고, 늙어가기도 하는 몸. 작품의 몸은 생명체 일반의 소통을 매개하는 장이면서도 나름의 리듬으로 박동하는 몸이 된다. 따라서 작가는 작품 자체의 변용 역량을 존중하고 보강하며 작품의 생을 돕는다. 그가 작품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돌봄’은 손바느질, 콜라주 등 정식화되지 않은 다양한 물성으로 가시화된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간극을 두고 발현된 작품의 몸은 존재의 몸을 다시금 화두로 제시한다. 당신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꿈으로 사랑으로 그리고 희망으로? 우리 모두가 부정하지 않을 답이 있다면, 그것은 몸이다. 우리는 몸으로 살아간다. 분화된 세계 속에서 모든 존재는 몸의 단위로 환원될 수 있다.인간의 몸은 점점 흐려지고 있다. 어떤 철학자의 이데아에서, 그리고 어떤 가상의 세계 속에서. 그러나 미결의 영역으로 남아있기에, 그리고 마땅히 할당되기에 몸이 갖는 고유함이 있다. 작가는 이를 전시장으로 소환하여 분절된 몸들의 왕래를 가능케한다. 언젠가 몸은 구시대적 매체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생명체들을 자르고 또 묶어놓는 것은 몸의 작용이기에 우리는 공명의 증거로서 몸을 맞대어 본다. 비물리적인 공감의 맥락은 비로소 개체화된 몸의 토대 위에서 태어난다.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여러 갈래가 분화되어 갈수록 존재에 대한 이해는 더욱 소홀해지고 미진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몸은 우리 존재를 아우르는 공통 기반으로서 서로의 단면을 맞대어 볼 수 있게 한다. 우리가 몸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한, 여러 갈래로 나뉘다가도 그것의 토양 위에 한 가락으로 집결할 수 있는 존재이다. 바로 여기서 지이호의 작업은 몸을 상술하는 해체와 접합의 장으로서 당신을, 그리고 우리를 한데 불러 모은다. 존재를 관통하는 접속의 운율은 그렇게 울려퍼진다.
C.A.S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현대미술학회 전시기획팀 C.A.S.는 다양한 예술 현상에 대한 스터디를 바탕으로 매년 전시를 기획,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학회원들은 전시 준비를 위한 모든 실무적 업무를 분담하여 수행하고, 작가별 큐레이팅팀을 구성해 활동합니다.2023년 C.A.S.는 총 9명의 학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학회장ㅤㅤ ㅤ신유정
부학회장 ㅤㅤ이재희
홍보 ㅤㅤㅤㅤ강혜인 박윤아
웹사이트 ㅤㅤ박민지 이나경
장비 ㅤㅤㅤㅤ박정연
촬영 ㅤㅤㅤㅤ김은서 이태영
최근 5년간 진행된 C.A.S의 전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ㅤㅤ2024 ⟪무풍지대⟫, TINC
eyeofthetyphoon.cargo.site2023 ⟪언피지컬 리듬⟫, 아트스페이스 이색&space mm
unphysicalrhythm.com2022 ⟪To Be Anything, To Be Nothing⟫, 탈영역우정국
neolook.com/archives/20230112i2021 ⟪body,download,manual⟫, 온수공간
neolook.com/archives/20220104c2020 ⟪P에 대한 혐오⟫, 을지로 OF
neolook.com/archives/20210106b